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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답변

친일 군인들 넘쳐나던 그 때 대한민국 구한 전쟁 영웅 김종성의 히

라이더 0 15
한국전쟁의 명장 김홍일지난 100년간의 역사적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가치체계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3 1운동과 8 15 해방은 항일투쟁을 했거나 지지한 사람들의 가치관을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관으로 정착시켰습니다 홍범도나 김구 등이 영웅으로 부각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편 사람들이 명분도 없이 부와 권력을 거의 독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친일청산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4 19혁명과 6월항쟁은 민주화 투쟁을 했거나 지지한 사람들의 가치관에 보편성을 부여했습니다 이 투쟁을 통해 부각된 김대중 김영삼은 대통령이 됐고 그 외 사람들은 새천년 들어 정치권 주류세력이 됐습니다 그러나 반대편 사람들이 부와 권력을 여전히 점유한 채 사회발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2016년에는 촛불혁명이 타오르고 8년 뒤에는 빛의 혁명이 발사됐습니다 인민군의 진격 막아내고 대한민국을 구하다 김홍일 장군 위키미디어 공용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사람들의 가치관이 그 뒤 오랫동안 보편적 가치관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백선엽이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됐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군인은 독립투사 김홍일 입니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제5권 김홍일 편은 황해도 경신학교 교사였던 그가 1919년 3 1운동 이전에 학생비밀결사사건 때문에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1921년 이후에 독립군단체인 대한의용군사회를 거쳐 중국 국민혁명군에 들어가 사단 참모 등을 역임했다고 기술합니다

김홍일은 중국 군관학교 교관 시절인 1937년에는 한인 학생 100여 명을 훈련시켜 이들을 조선의용대로 편성하여 항일투쟁에 참여 시키고 1944년에는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참모장이 되어 국내상륙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이처럼 3 1운동 이후부터 전쟁 무대를 누빈 김홍일의 관록이 투영된 무대가 1950년 6 25전쟁입니다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인민군의 진격으로 인해 대한민국 영토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났습니다

낙동강 전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것은 8월 1일입니다 인민군의 진격은 그처럼 빨랐습니다 인민군이 부산을 점령했다면 유엔군은 한국이라는 성곽 밖에서 공격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됐다면 미군이 성 안의 인민군을 제압하기가 곤란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유엔군이 일본 등에 진을 쳐야 하므로 전쟁의 범위와 파급력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산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유엔군이 전열을 갖출 때까지 인민군의 진격이 지체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쟁의 향방을 갈랐습니다 이는 김홍일이 인민군의 발목을 한강 이북에 묶어놓은 직접적 결과다

개전 사흘 만인 6월 28일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이날 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가 폭파된 것이 인민군의 도강을 지연시켰지만 이것이 주된 원인은 아닙니다 주원인은 한강 이남의 국군이 여러 날 동안 버틴 점에 있습니다

국방부 국방홍보원이 발행한 2021년 제569호 기사 6 25 개전 초 한강방어전으로 대한민국을 구하다 는 전쟁 발발 직전만 해도 육군참모학교 교장이었던 김홍일 소장이 야전사령관으로 전격 발탁되는 극적인 상황을 기술합니다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고 나서야 채병덕 참모총장은 뒤늦게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김홍일 소장은 이때부터 일분일초를 쪼개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며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개전 직후에 김홍일은 서울을 빨리 포기하고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하자 고 제안했지만 국군 지도부는 상황을 오판해 이 건의를 무시했습니다 그랬다가 전방 병력을 대거 상실하고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기자 김홍일에게 구원투수 역할을 맡겼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김홍일 말대로 했다면 국군 정예부대가 한강 이남에 일찍 진을 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군 전력이 삼팔선에서 대거 와해됐기 때문에 김홍일은 패잔병을 모아 한강 이남을 방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훨씬 약화된 전력으로 한강을 지키게 됐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길이 24km짜리 방어선을 구축한 김홍일은 그야말로 기적적인 결과를 연출했습니다 의 설명입니다 30일 새벽부터 북한군은 한강 도하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완강한 국군의 저항에 실패했습니다 북한군은 도하 첫날에는 노량진 부근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점차 여의도와 영등포까지 전선을 확대했지만 번번이 국군의 방어전에 막혀 꼼짝없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미국 육군 제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상륙한 것은 7월 1일이고 이 부대가 경기도 평택 안성에 진지를 구축한 것은 7월 2일 밤입니다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한강을 넘은 것은 7월 3일입니다 삼구트리니엔 시그니처 인민군이 한강을 넘기 직전부터 미군이 한강 남쪽 지역에서 대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7월 3일 이후에는 인민군의 진격이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홍일은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의 닷새 동안 패잔병들과 함께 인민군의 도강을 저지했습니다

이것이 밑받침이 되어 유엔군이 반격을 가했으니 더글러스 맥아더의 전공도 김홍일의 전공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육군본부가 발행한 제1집은 6월 25일 현재 98 000명이었던 한국군은 6월 말에는 22 000명 이었다며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제외한 전 부대는 최초 공격을 받아 와해되었으며 반격 작전 능력은 전혀 없었다 고 평가합니다 이처럼 한국군이 현저히 약화된 6월 말부터 김홍일은 기적을 연출했습니다 이로써 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유엔군은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습니다 후퇴하라 는 김홍일의 말 거부한 백선엽 1995년 8월 8일 오전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거행된 김홍일 장군 제15주기 추모식

연합뉴스서울 함락 전날인 6월 27일 오후 채병덕 총참모장 은 문산지구 제1사단장인 백선엽 대령에 대한 작전지도권을 김홍일 소장에게 부여했습니다 이에 따라 김홍일은 백선엽 부대의 전투 상황을 관찰하다가 그 부대가 포위망에 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김홍일은 한강 이남으로 신속히 후퇴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백선엽은 거부했습니다 총참모장이 김홍일에게 부여한 것이 백선엽 자신에 대한 지휘권이 아니라 지도권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위 책은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제외한 전 부대는 최초 공격을 받고 와해 됐다고 기술합니다 백선엽이 지휘한 부대는 제1사단입니다 그 뒤 백선엽이 거둔 전공은 유엔군과의 공조하에서 나온 것입니다

김홍일은 그런 지원 없이도 닷새간이나 대군을 강 건너에 묶어놨다 누구의 역량이 더 큰지를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김홍일은 전공과 역량을 인정받아 제1군단장으로 승진했습니다

대통령 이승만이 군을 지휘할 자격이 없다는 점은 얼마 뒤 증명됐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최고의 명장을 이유도 없이 갈아치웠습니다 이때가 9월 1일입니다

이날 한국군은 김홍일이라는 노련한 야전지휘관을 잃었습니다 국방부 군사 편찬연구소의 2016년 제99호에 수록된 이동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원의 논문 6 25전쟁 초기 김홍일의 활동과 예편 은 백선엽 정일권 같은 친일군인들을 통해 군부 장악력을 높이고자 했던 이승만의 구상과 더불어 김홍일이 작전 수행 중에 미군과 마찰을 빚은 것이 김홍일 퇴진의 원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지난 29일 경주 한미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가 공식적인 전쟁 상태 에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휴전 상태를 환기시키는 발언입니다 신독산 솔리힐 뉴포레 트럼프의 말처럼 한국전쟁이 휴전 으로 끝나게 만든 핵심 인물은 김홍일입니다

한국전쟁의 한국측 최대 공로자는 독립군 출신 김홍일입니다 백선엽의 과오를 명확히 적시하고 김홍일을 이 전쟁의 명장으로 기억해야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올바로 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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